1. 유적위치 덕산면소재지에서 남서쪽으로 나 있는 622번 도로를 따라 10km정도 가면 남쪽으로 낙상리(樂上里)로 들어가는 입구가 나온다. 이 입구에서 길을 따라 2km 정고 들어간 도로의 동쪽 길가에 쌍효각이 위치한다.
쌍효각 전경
쌍효각
2. 연 혁 이 정려는 지극한 효행으로 부모를 극진히 섬겨 주위의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킨 인영원과 성주배씨 부부의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1927년 명정 받아 세워진 것이다. 정려가 자리한 덕산면 낙상리 검마내는 일찍부터 교동인씨가 집성촌을 이루며 거주하던 곳으로 조선 초기의 인물인 인삼석(印三錫)이 입향한 이래 계속 번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34년에 작성된 『朝鮮の姓』에도 덕산면 낙상리에 교동인씨가 32호 거주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입향조라 알려진 인삼석은 교동인씨 덕산파의 시조가 되는 인물이다. 생몰년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의 6대손 명열(命說)이 1674년생이므로 삼석은 대략 1550년 전후에 활동하였을 것이다. 원래는 서울 등지에서 거주하고 있었으나, 처가인 청주송씨의 세거지였던 덕산으로 이거해 오면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고 한다. 각종 지리지에 덕산의 덕풍(德豐)과 이산(伊山)의 토성으로 모두 송씨가 기록되어 있어 송씨가 려말 선초부터 덕산에 살고 있던 토착성씨였음을 알 수 있다. 자손들의 전언에 의하면 청주송씨는 덕산 특히 삽교에서 아주 부유했던 집안이고, 이 재력을 통해 사위 인삼석이 세거의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후로 인삼석의 후손은 홍성 공주 등지까지 널리 퍼져 거주하고 있다.
3) 인희배 선행비
인영원(1834~1906)은 삼석(三錫)의 11대손이다. 형상(衡相)의 둘째아들로 태어나, 집안 형편이 어려웠던 까닭에 성주배씨 배은모(裵殷模)의 딸과 혼인한 후 배씨집안의 데릴사위로 들어갔다고 한다. 처가에서 살다가 3년만에 집으로 돌아온 후에는 부모를 효성으로 섬기고 형제간에 우애있게 지내며 또한 집안일을 성실하게 처리하여 가세를 키웠다. 그러나 재산에 욕심을 갖지 않고, 형에게 항상 양보하며 자신을 낮추었다. 1902년 승조랑경릉참봉중추원의관(承調郞景陵參奉中樞院議官)을 지냈고, 죽은 후에는 효행으로 증숭정대부판돈녕중추부사자헌대부공조판서통정대부개승원좌승지(贈崇政大夫判敦寧中樞府事資憲大夫工曹判書通政大夫改承院左承旨)에 증직되었다. 인영원의 효자 정려는 그가 죽은 후 25년만엔 1927년에 건립되었다. 한편, 정려각 앞에는 인희배(印熙培)의 선행비(善行碑)가 있고, 또 100여미터 떨어진 곳에 1929년에 세워진 인영배(印泳培)의 송덕비(頌德碑)가 있다. 희배는 인영원의 장남이고, 영배는 인영원의 큰조카로, 정려 건립에 주도적 역할을 한 인물이기도 하다. 전언에 영배는 마을에서 큰 부를 축적하여 자신의 논밭을 따라 백마를 타고 논두렁으로 다녔다고 하며, 곡식을 수확하면 가난한 동네사람들에게 나눠주는 등 선행을 베풀어 동네사람들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비석을 건립했다고 한다.
또한, 영원의 아들 희배는 일찍부터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1926년 자기가 살던 곳에 두칸짜리 집을 지어 ‘금천사숙’이라 이름 짓고 사람들을 가르쳤다. 이 사숙이 바로 수덕공민학교의 시발이었으며, 수덕공민학교는 현재 수덕초등학교가 되었다. 금천사숙에 글을 배우는 사람들은 인근 마을 사람들 뿐만아니라 덕산과 홍성 등 먼곳출신들도 많았다고 한다. 희배의 집 앞에는 고목 한그루가 있어 자신의 호를 ‘괴당(槐堂)’으로 하였는데,
금천사숙 터의 고목
지금 사숙의 흔적은 없어졌지만 이 나무는 여전히 마을 중앙에 우뚝 서 있다. 인영원의 정려를 받는 과정에 대한 기록은 아쉽게도 남아있지 않다. 자손들의 말에 따르면 인영원과성주배씨의효행에탐복한유림들이모묘성전도원대성문예경약소(慕墓聖奠道院大成文藝京約所)에 통문을 돌려 정려가 세워졌다고 한다. 여기에는 인영배와 인희배가 마을에 베푼 선행도 큰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넉넉한 재력을 바탕으로 마을 주민들을 돕고, 교육활동을 하는 등 이무렵 교동인씨의 위상은 마을내에서 뿐만아니라, 주변지역까지 널리 알려졌을 것이 분명하므로, 많은 이들이 교동인씨에 협조하여 정려 건립을 주도했을 것을 추측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인영원은 숭정대부판중추부사(崇政大夫判中樞府事)에 증직되고, 부인 배씨는 정경부인(貞敬夫人)이 되었으며 1927년에 정려를 건립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집안에서는 정려의 수호를 위하여 밭 400여평을 ‘효정전(孝旌田)’이라 하고 이곳에서 나오는 수확물로 정려를 정비하고 있다.
3. 인물행적 인영원(印榮源, 1834~1906)은 교동인씨 덕산 입향조 인삼석(印三錫)의 11대손이다. 호는 삼산(三山), 자는 여행(汝行)이고 아버지는 형상(衡相)이다. 3세 때 부친상을 당해서는 매우 서러워한 나머지 여러 차례 기절하였고, 장례를 예에 따라 마치고 나자, 집안에는 남은 재산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하여 그후 홀로 계신 모친을 모시는데 품을 팔아서 쌀과 반찬을 사서 극진히 공양하여 마을 사람들이 ‘董永의 貨錢, 子路의 負米, 黃香의 扁枕 등을 말로만 들었더니 이제 실제로 보았다’고 하며 칭송이 자자하였다고 한다. 20세 때 성주배씨 배은모(裵殷模)의 딸과 혼인한 후 배씨집안의 데릴사위로 들어갔다가 3년만에 본가로 들어와 부부가 편모를 지성으로 섬기며 화목하게 지냈다. 후에 효성이 알려져 명정받기에 이르렀다.
4. 유적현황 정려각의 테두리에 토담을 두르고 정면에는 팔작지붕 양식의 문을 만들어 놓았다. 토담의 안쪽으로는 화강석재로 기단을 조성한 뒤 정․측면 1칸의 다포식 가구를 한 건물을 세웠다. 건물은 겹처마에 팔작지붕 양식을 하고 있으며 정면 상단에는 「쌍효각(雙孝閣)」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기단위에는 화강석재로 된 팔각고주초석과 원주를 세우고 있으며 건물의 4면에는 홍살이돌려져있다.정려내부후면상단에는“孝子景陵參奉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資憲大夫工曹判書崇政大夫判敦寧府事贈謚孝靖喬桐榮源之門”, “孝婦印榮源妻貞敬夫人星州裵氏之門 至聖先師誕降二千四百七十七年亦雇黃牛靑龍 日表旌 京城慕聖尊道院” 이라고 각서된 2기의 현판이 걸려 있다. 정려의 좌측에는 1927년 이재현(李裁現)이 지은 「창효각 략기(彰孝閣 略記)」가 우측에는 1930년 지은 「찬양문(贊揚文)」이 걸려 있다. 또한 정려 내부에는 찬성금표(贊成金表)와 찬양문사표(贊揚文士表)가 걸려 있고 정려 앞에는 1983년 세운 인희배(印熙培)의 선행비가 있다.
6. 전설․일화 인영원과 성주배씨는 금슬 좋은 부부였다. 1857년 겨울 모친의 병환이 위중하자 정성껏 병수발을 들었고, 뒷산 정결한 곳에 단을 쌓고 열흘 밤을 정성껏 기도를 드렸다. 기도가 끝나는 날 모친의 꿈에 한 노인이 문병 왔다가 돌아가자 그 후로 병이 나았다한다. 그 후에도 매년 정월초에는 부부가 함께 그곳에 가서 모친의 장수를 빌어, 모친은 그후 17년을 더 살았다. 그러나 1873년 다시 병이 들어 갑자기 세상을 떠나니, 상례를 치루고, 현 정려의 건너편 골짜기에 있는 묘소에서 시묘살이를 하며 부부가 함께 애통해 하였다. 그러나 그 슬픔으로 부인은 병을 얻어 이듬해에 세상을 떠나니 인영원 홀로 3년 상을 극진히 치렀다.
※ 관 리 자 : 인성환 (모친 337-6335 ; 현 천안거주) ※ 제 보 자 : 인대식 (현 이장, 337-6322, 011-9405-6322)